[새로시작하는삶] 알코올 중독 기적적으로 치유, '참회' 시집 펴낸 허근 신부
여기 한 사제가 자신이 과거에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고백한다. 한밤중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 미사 시간에도 큰 대자로 뻗어 있었을 정도로 중증이었다. 최근 알코올 중독에서 치유돼 ＜그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시집을 펴낸 가톨릭알코올사목센터 소장 허근 신부를 만나보았다.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아름다운 세상을 보았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좋은 친구들을 만났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건강한 몸으로 살고 있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하느님을 좀더 사랑했을 텐데.
최근 ＜그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시집을 낸 허근 신부(50). 성직자인 ‘신부’라는 신분으로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던 그가 치료를 통해 정상인이 된 후 그 시절을 참회하면서 솔직하게 쓴 글들을 시집으로 엮은 것이다.
“광주에서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을 때 그동안의 나를 뒤돌아보면서 반성을 많이 했죠. 술에 의지하며 살았던 나날들과 신부로서의 참회를 조금씩 글로 남기기로 했죠. 이 시들이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 없었기에 현재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모세의 기적’에 버금가는 기적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허신부．성직자가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 사연이 자못 궁금해진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 대학졸업때까지 술 못마셔]
“친가와 외가 모두 몇 대째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새벽미사에 꼬박꼬박 나갔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는 신학교 부설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다녔죠．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1980년 돈암동 성당의 보좌신부로 임명된 그는 성직자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도도 열심히 하고 의욕적으로 사목활동을 했다. 이듬해 추기경의 비서를 할 때까지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였다.
82년도에 병영 내의 신자를 위한 사목활동을 위해 해병대 부대의 군종신부로 가게 되면서 술과의 악연이 시작됐다. 일반 군인과 똑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힘든 훈련을 견뎌야 했다는 그는 무엇이든 ‘끝장을 보는’ 해병대의 기질이 술 먹는데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4년 가까이 지내고 나니 이미 술을 마시는 습성이 몸에 밴 상태였다.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고 갔는데 술을 좋아하고 화통하니까 처음에는 신자들이 좋아했어요. 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그게 얼마 안 갔죠.”
허신부는 그 무렵 맥주는 거의 한 박스, 소주 5~6병 정도는 기분 좋게 마실 정도로 술을 잘 하게 됐다고 한다. 한번은 새벽 미사를 끝내고 해장국 집에서 술을 먹기 시작했는데 문득 밖을 보니 저녁 노을이 지고 있을 정도였다. 술자리가 밤새도록 이어지면서 어느새 신부의 역할은 뒷전이었다. 새벽 미사를 주도하기로 한 날 일어나지 못해 보좌신부가 난처한 표정으로 달려오기 일쑤였고 성당에서 송년회를 하는데 술 취해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내뱉어 신자들을 당혹케 한 적도 있다.
“술을 마시고 자고 있는데 신자가 와서 ‘큰일났다’는 거예요．전날 밤 술좌석에서 말다툼 끝에 제가 신자를 때렸고 그 신자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죠. 한번은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 할머니를 방문해야 하는데 다리가 풀려서 걷지를 못해 몇 집을 돌다가 돌아온 적도 있어요. 사람들한테 참 많은 죄를 지은 거죠.”
일반인도 아닌 신부가 술에 취해 사람을 때렸으니 ‘저건 신부도 아니다’라는 비난이 나올 만했고 소문은 금방 신자들 사이에 퍼져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술이 유일한 위안처가 됐고 몸은 몸대로 더 망가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평소에 그를 걱정하던 서울대교구 김옥균 주교가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사제 생활을 하겠냐고 했을 때는 술을 끊겠다고 다짐도 했었지만 1년 후에도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변에서 여러 사람이 이러다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에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고 광주에 있는 알코올 치료 병원으로 내려갔다. 그때 심한 영양결핍으로 몸무게는 46kg이었으며 모든 신체 기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해병대에서 배운 술로 생명까지 위협받아]
지금 필요한 것은/술을 끊는 일//지금 해야 할 것은/술에 가까이 가지 않는 일//지금 알아야 할 것은/술의 독， 그리고/술을 마시면 죽는다는 것.’（‘지금 필요한 것은’ 전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신체와 정신이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그래서 생물학적으로 숨이 끊어지는 것뿐 아니라 몸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죠．광주로 내려가기 직전의 저는 죽은 거나 다름 없었던 거예요.”
우선 2주간 폐쇄병동에 들어가 해독기간을 가져야 했다. 이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를 생각하니 말할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고 한다. 이때부터 하루 한 번 햇볕을 쬐는 시간을 기다리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폐쇄병동에서 나온 후에는 회복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단점을 파악하여 성격을 고치는 훈련을 했다. 자기 비판과 반성의 시간이었다.
만 4개월 정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완치가 될 무렵 서울에 올 생각을 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그동안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과 동료들을 어떻게 봐야 할 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묵상을 하는데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생각났다. 왜 내가 과거에 붙들려 있는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새롭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느님이 이만큼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고 한다.
그 후에도 허신부는 매주 광주로 내려가 치료를 받았고 완치가 되자 99년 10월부터는 서울 중림동에 있는 가톨릭알코올사목센터의 소장을 맡게 됐다. 처음에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자신이 어떻게 알코올사목센터에서 일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었지만 89년에 상계동 성당의 주임 신부를 하고 있을 때 추기경이 한 말이 떠오르면서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해 사제 생활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때 아일랜드에서 오신 신부님이 알코올 중독자 모임을 만들어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 당시에 한창 술을 마시고 있었을 때라 더운 여름날 고생하시는 신부님한테 가서 ‘맥주 한잔 하세요’ 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 신부님이 그해에 돌아가셨고 추기경님이 장례미사를 하시면서 ‘외국 신부님이 한국인 알코올 중독자를 위해 일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하루 빨리 알코올 중독자를 위해 봉사할 신부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느 순간 그 말씀이 떠올랐고 이후 머릿속에 남더군요. 결국 부족하지만 제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알코올사목센터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나 가족들을 상담하고 상태에 따라 병원을 소개하거나 퇴원하면 재발하지 않게 단주 모임을 갖도록 유도하는 일을 한다. 단주를 결심하고 치료를 받은 후에는 지속적으로 단주 모임에 참여하여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술이 없는 상태에서의 대인관계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허신부는 알코올 중독을 술을 마시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일어나면서 술을 갈망하게 되므로 의존병이라고 규정짓고 상담을 하면서 의지가 아닌 정서에 호소한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의 경우 의지는 이미 무너진 상태라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생각해도 발은 이미 술집을 향하고 있을 수밖에 없지만, 가족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걱정하면서 끈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허신부 스스로 알코올 중독자였고 치료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알코올 중독자가 누나와 어머니에게 이끌려 왔어요. 슬리퍼를 신고 끌려왔는데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저를 보더니 할머니 장례미사를 술 취해서 했던 신부 아니냐고 하는 것이었어요. 술 취한 신부가 미사를 했는데 돌아가신 할머니가 과연 천당에 갈 수 있었겠냐고 하더군요.”
그 때 허신부는 ‘그 당시에 당신은 건강한 음주자였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건강해졌고 당신은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결국 그 알코올 중독자를 설득하여 치료를 받게 했고 그는 지금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술취한 신부가 미사를 올려도 고인이 천당에 갈까요?”]
지난해 5월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알코올 중독자 수는 알코올 남용자와 의존자를 포함해 7백30만명 정도. 알코올 중독자의 대다수가 자신은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계속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모임에서 술 마시기를 강요하고 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것이 우리나라의 음주행태이기 때문이다.
허신부는 내가 귀중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 비로소 단주는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허신부 자신도 예전에는 문제가 생기면 술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은 진정한 해결도, 진정한 위로도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에도 처음부터 술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깨어 있으려는 자세를 유지하며 유혹을 뿌리쳤다고 한다．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는 자신이 대견스러워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곤 한다고.
허신부는 5월 초 술에 대한 이론과 임상을 공부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떠난다.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하느님이 제게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하니 알코올 중독에 관해 더 공부를 해야 될 것 같아 연수를 갑니다．앞으로 알코올 중독에 대해 잘못 알려진 지식과 편견들을 바로잡아 더 이상 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글·김민선<자유기고가>
사진·김용해 기자
기사 입력시간 : 2001.5.14
|
|
| 
19 
| 1/2 
알코올 중독 성직자의 용기 
